임신 15주

Baby 너의 이름은?

아이의 태명은 여태 없었기에 남편과 나는 아이를 그냥 baby로 불렀다.

그러나 아이의 성별을 알게 된 이후로 아기 이름을 무엇으로 지을지에 대한 고민이 많아졌다. 

(내가 사는 독일의 지역은 출산한 병원에서 바로 지역 관청에 출생신고를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이 갖춰져 있기에 이름을 지금부터 짓고 막판에 확정을 해야 아이 출생 후 병원에서 할 서류처리가 한결 쉬워질 것 같다.)

아이는 독일 혹은 프랑스에서 계속 성장할 테니 이름은 유럽식으로 지어주는 게 여러모로 아이의 인생을 편하게 하는 길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 부모님도 발음하기 쉽게 부를 수 있는 한국 이름을 하나를 지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서 없어지지가 않았다.

남편과 상의 끝에 first 이름은 유럽식 middle 이름은 한국식으로 지어주기로 일단 결정을 했다. 

남편은 내가 한국인이라서 그렇게 생각했는지.. 나에게 너희 부모님께 이름을 지어 달라고 부탁드려야 하는 건 아니냐고 묻는다. 나는 우리 부모님 뿐만 아니라 요새 어른들은 그렇게 손주 성명 짓는 것에 적극 관여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얘기를 하면서 남편에게 나는 “우리 엄마는 특히 더 우리가 어떤 이름을 주든 전혀 관여하지 않을 거야…”라고 대답했다. 

내가 이렇게 대답한 이유는 이러하다.

내가 어릴 적 나의 친할머니가 내 이름을 손수 지어주셨다. 그런데 우리 엄마는 그 이름이 티브이에 나오는 본인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아나운서의 이름이라서 정말 싫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시어머니에게 반기를 들을 수 없었던 엄마는 내 이름의 마지막 자만 바꿔서 출생 신고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후로 집에서는 엄마 아빠 모두 주민등록과 다른 시어머니가 준 이름으로 나를 불렀고, 학교 선생님과 친구들을 나를 주민등록상 이름으로 불렀다. 다행히도 그때 나는 그냥 나한테는 이름이 두 개 인가보다 라고 생각했지, 단 한 번도 명절에 방문한 할머니 앞에서 “엄마, 왜 내 이름은 두 개야?”라든지 “엄마, 나 학교에서는 xx라고 부르잖아..”라는 말을 기특하게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친할머니는 당신이 돌아가실 때까지 내 주민등록상 이름이 본인이 지어준 이름이라고 생각하고 돌아가셨다. 

이런 사연이 있기에 나는 엄마가 절대 내 아들의 이름 짓는 것에 크게 신경 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그래도 엄빠의 의견을 수렴해서 한국 이름을 지어주고 싶기는 했으므로 몇 개의 후보 이름들을 들고 엄마에게 카톡으로 이 중에 어떤 게 제일 나은 것 같냐며 물었다. 

엄마의 반응은 내 기대를 완전히 벗어났다. 엄마는 내 후보 이름들이 모두 맘에 들지 않는지 카톡을 보낸 날 이후로 낮 밤을 가리지 않고 며칠간, 엄마가 생각하기에 부르기에 부드럽고, 좋은 이름들을 계속해서 전송했다.

그런데 그 이름들이라는 게 당신이 좋아하는 클래식 피아니스트, 작곡가, 화가 등 (물론 나도 first 이름에 좋아하는 화가 중 하나인 vincent를 올려놓고 있기는 했다.) 너무나도 유명인들의 이름들이었고 심지어 얼마 전에 폭망 한 코인 이름(루나)도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어이가 없었지만 예의 바르게 거절했다. 하지만 엄마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제 본인이 좋아하는 소설 속 인물들의 이름을 전송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그중에는 나도 마음에 드는 몇 개의 이름이 있어서 몇 개의 후보를 두고 엄마와 함께 고민 중이다.

이번 일을 통해 알게 된 엄마의 모습, 내 인생의 모든 결정에 있어서 한 번도 깊이 간섭하거나 관여한 적 없는 엄마의 이런 모습은 정말 의외였다. 

이름이 결정된 이후 엄마는 손자의 이름을 딴 시 하나를 내게 선물했다. “xx이 태어나면 이 시를 꼭 프랑스어나 독일어로 번역해서 알려줘. 엄마 부탁이다.” 

며칠 전 엄마는 또 나에게 말했다. “엄마는 예전에는 오래 살고 싶다 그런 생각을 별로 안 했었는데 요즘에는 xx가 태어나고, 성장하고, 나중에 결혼하는 모습까지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이 드네…” 

내 아들의 존재는 이름을 지어준 이후에도 솔직히 말하면 아직 나의 인생에 대한 perspective를 크게 바꿔 놓은 것 같지는 않다. 아직도 나는 내 위주로 내 인생의 미래를 그려나가고, 그 그림의 범위를 아주 조금 넓혀 남편, 우리 부모님을 넣는 정도이다. 그러나 이미 아이를 낳고 키워 거진 마흔이 되기까지 지켜본 엄마, 즉 이제 70 노년의 인생을 살고 있는 엄마의 당신의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은 손자의 탄생 이후로 그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는 것을 느낀다. 당신이 이름을 지어 준 이후로는 더더욱.. 그리고 그 사실이 내 마음을 조금 슬프게 한다.